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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 눈오는 날엔 산에 오른다.
    산(山), 산(産), 산(散) 2021. 2. 12. 01:11

    번 겨울은 유별나게 산에 눈이 적다. 그렇다고 눈이 내리지 않는 것도 아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해발 3천 미터 이상에는 눈이 내리고 있다. 보는 것조차도 지칠 정도로 많은 눈이 내렸던 것은 지난해 11월이었다. 일주일 넘게 하루도 쉬지 않고 눈이 내렸고 고도가 높은 지역에는 어마어마한 적설량을 기록했다. 한 주간 내린 눈의 적설량이 연평균보다도 많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에 눈이 적게 쌓인 것은 따뜻한 날씨 탓이다. 해마다 기온이 상승하는 추세는 이번 겨울에도 이어졌고, 한 겨울인데도 봄날처럼 따뜻하다.  높은 기온으로 눈사태와 산사태가 걱정이다. 이미 크고 작은 사고로 이 곳 저곳에서 피해가 발생했다. 특히 산림도로가 유실되는 것이 걱정이다. 산림 도로가 폐쇄되면 산에 오르지 못한다.  이미 많은 등산로가 폐쇄되었고 접근조차도 어렵다.  

     

    또 한가지 걱정은 여름에 발생하게 될 가뭄 현상이다. 일 년 중 300일가량 비가 내리는 시애틀이지만 가뭄에는 취약하다. 물이 풍부하다 보니 역설적으로 물 공급망이 세밀하지 않다. 대부분의 지역이 지하수에 의존하고 있어 한 겨울에 쌓이는 적설량이 곧 저수량에 영향을 미친다. 특히 과실수와 감자 농사를 기본으로 하고 있는 내륙지방은 절대적으로 적설량에 의존하고 있다. 

     

    눈이 없는 겨울 산행은 상상하는 것 조차도 싫다. 현실적으로도 “그럴 리가?” 라며 스스로를 안심시키려 하지만 이번 겨울이 딱 그 지경이 되는 것 같아 적잖이 실망하고 있다. 그렇다고 산에 눈이 아예 없다는 것도 아니다. 가까운 산에 눈이 쌓여있지 않다는 뜻이지 멀게 그리고 높게 올라가면 눈이 쌓여있다. 그렇기 때문에 눈을 찾아 떠나는 산행은 몇 갑절의 노력을 쏟아부어야 한다. 이동 거리가 멀어지고 고도가 높아지니 준비해야 할 것도 많다. 

     

    그래도 좋아서 떠나는 산행이니 약간의 번거러움은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다. 문제는 등산로까지 접근하는 방법이다. 해발 3,000 미터 정도에 위치해 있는 등산로를 찾아가려면 우선 4륜 구동의 기능과 스노우 타이어를 갖춘 차량을 이용해야 한다. 웬만한 수준의 4륜 구동 기능으로는 자칫 낭패를 겪을 수 있다. 요즘 판매되는 SUV(Sports Utility Vehicle) 에는 AWD(All Wheel Drive) 즉 전륜구동 시스템이 장착되어 있어 가볍게 모험을 즐기려는 소비자에게 알맞은 옵션을 제공한다. 그러나 한 가지 유념해야 할 것은 AWD 기능은 산악지대에서는 별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평지의 비포장 도로이거나 낮은 구릉에서는 어느 정도 효과가 있으나 장애물이 잔뜩 깔려있는 산악 도로  특히 눈이 쌓인 곳에서는 거의 무용지물이나 마찬가지다. 스노우 체인을 장착해도 별 소용이 없다. 눈이 쌓인 산길로 이동하려면 4륜 구동 기능과 스노우타이어를 장착한 트럭이 제격이다. 

     

    이번 겨울에 지금까지 모두 8 차례의 산행을 시도했으나 성공한 것은 4 차례 뿐이다. 해발 3천 미터를 찾아갔어도 눈이 없거나, 등산로에 접근할 수 없었던 경우다. 두 주전에 큰 바람이 불어 시애틀 일대가 정전사태를 겪은 적이 있었는데, 산에서는 커다란 나무들이 뿌리 채 뽑히면서 산림 도로를 가로막았다.  

     

    그토록 오랜 기다림 끝에 오늘 겨울 산을 탔다. 비록 고도는 높지 않았고 시간도 비교적 짧았지만(5 시간) 대단히 만족스러웠던 산행이었다. 많은 눈이 내렸고, 기온도 뚝 떨어진 탓에 마치 한 겨울이 발길에 채이는 듯했다. 얼마 만에 느껴보는 겨울의 맛인지…

     

    오전 10시 경, 산행길 입구에 도착했다. 삼십여 대 주차할 수 있는 공간에는 달랑 두 대의 차가 주차되어 있었다. 오늘 이 산의 주인임을 자처한 산행꾼이 아주 적다는 것을 아주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비는 내리지만 날씨는 온화할 것으로 짐작했었다. 주차장과 산행의 입구는 여느 때처럼 질척거렸고 어느 곳에서도 눈 한점 찾아볼 수가 없었다. 서둘러 등산화로 갈아 신고, 배낭을 짊어지고 산길에 들어섰다. 두 주 만에 산행인지라 발걸음은 무거웠고 종아리의 근육이 금세 굳어졌다. 좀처럼 허파가 열리지 않아 숨을 몰아쉬는 일이 반복되었다. 두 가지 원인이라 짐작했다. 하나는 이른 아침부터  지나치게 많이 마신 커피의 영향일 테고, 또 하나는 요즘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 탓 일 것이다.  첫 15분이 그날의 산행을 결정짓는 것은 나의 고유한 습관이다. 다른 사람은 어떤지 묻지 않아 그저 나의 경우와 비슷할 것이라 추측만 할 뿐이다. 십오 분 안에 허파가 열리고 심장박동수가 정상을 되찾고 숨쉬기 고르게 되면 그날의 산행은 별 무리 없이 진행된다. 그러나 삼십 분이 지나도록 가슴이 조여드는 것 같고 숨쉬기가 거칠다면 그날의 산행은 자칫 고행이 될 수 있다. 근육통이 쉽게 발생하고 고통을 참기 위해 인내심을 발휘해야 한다. 십오 분 동안에 숨쉬기가 편해질 수 있도록 가능한 천천히 오르고 다른 생각을 자꾸 끄집어내어 걷는 것에만 집중하려는 몸의 리듬을 방해한다. 다행히도 오늘 산행의 서막은 곡절을 겪지 않았다. 허파가 열리고 숨쉬기가 편안해진 것은 이십여분이 지났을 때였다. 마치 우연이 맞아떨어진 것처럼 그때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진눈깨비로 시작하더니 어느새 싸라기 눈 그리고 함박눈으로 바뀌었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눈발은 굶어지고 밀도가 높아지며 점점 주변은 설국으로 변해갔다. 코스가 갈라지는 갈림길에 도착했을 때에 이미 이 곳은 하얀 눈으로 빚어낸 조각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갑자기 차가워진 공기로 안개가 뒤덮이며  순식간에 상상의 세계로 들어온 듯했다. 계곡에 빼곡히 들어찬 전나무와 삼나무는 모두가 키가 큰 얼음 장수로 변해있었다. 덥수룩한 눈 수염에 뾰족한 모양의 투구를 푹 눌러쓴 모습은 영락없이 동화에서나 만나 볼 수 있는 캐릭터였다. 계곡을 건너고 가파른 비탈을 오르면서 하늘과 땅이 맞닿아 있다는 착시 현상을 경험하게 된다. 원근감도 사라져 버려 마치 평면의 그림 속에 들어온 듯했다. 

     

    그렇게 걷기를 한 시간, 1.5 마일 정도를 이동했을 것이고 고도는 약 1000 피트 올랐을 것이다. 기온과 기후는 한 시간 전과는 전혀 달라졌다. 시작한 곳이 늦 가을 날씨라면 이 곳에서는 겨울을 완연하게 느낄 수 있었다. 이 곳에서 2 마일을 더 가면 <프랏 Pratt Lake>이라 불리는 아담한 호수가 나온다. 그런데 여느 호수와는 다르게 경치는 별로다. 아마도 과거에 과하게 저지른(?) 벌목으로 산은 제모습을 잃었고 호수 주변이 망가진 탓이리라… 사람들이 잘 몰라서 그렇지 사실 이 산행길은 끝이 없다고 표현할 정도로 이어짐의 연속이다. 아마도 북쪽 캐나다 국경까지 이어지지 않았을까 짐작할 뿐이다. 굽이 굽이 고개를 넘어 돌아가다 보면 수십여 개의 크고 작은 호수를 만나게 된다.  필자가 그중에 한 곳을 찾아갔던 것은 육 년 전의 일이었다.  <톰슨 호수 Thompson Lake>라 부르는 곳인데 산행길 입구에서 약 15 마일 떨어진 곳이라 일 년 내내 인적이 드문 곳이다. 그 덕분에 호수는 태곳적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고즈넉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다. 이 곳을 찾았던 이유는 자원봉사 대원으로 참가했기 때문이다. 산행길을 가로막고 있던 쓰러진 나무를 치우기 위한 작업이었다. 워낙 장거리 이동이라 작업 기간이 나흘로 잡혔었다. 입산에 하루, 하산에 하루 그리고 나무 치우는 작업에 하루 또는 이틀… 자원봉사자는 모두 6명으로 제한된 소규모 원정대였다. 필자는 사정상 오후 늦은 시간에 합류할 수 있었다. 그 먼길을 혼자서 찾아가려니 처음 몇 시간은 적잖이 걱정스럽기도 했다. 아니나 다를까 6 마일 지점부터는 산 길의 흔적을 더듬어가며 찾아가는 난해한 길이었다. 설상가상 도중에 눈보라와 우박을 동반한 폭풍을 만났다. 이때가 10월 중순이었고 또 산행을 시작하던 시각에는 그야말로 “햇볕은 쨍쨍”이었던 지라 전혀 예상치 못한 우박의 습격이었다. 우박은 짧게는 몇 초 길어봐야 1-2 분 남짓 내리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 날의 우박과 눈보라는 장장 두 시간을 쉬지 않고 내렸다. 거의 목적지에 다다랐을 즈음에 멈췄으니 가을 산행이 졸지에 겨울 산행으로 바뀌었던 것이다. 문제는 내 몰골이었다. 여벌의 옷을 준비했으나 미쳐 두꺼운 파커는 챙기지 않았다. 게다가 땀이 흐르는 것을 싫어하는 탓에 티셔츠만 걸치고 있었다. “금방 걷히겠지…”라고 안일하게 생각한 것이 패착이었다. 한 시간 이상 영하의 기온에 상체와 양팔이 노출되었고 이때부터 어깨와 팔뚝 그리고 팔목까지 감각이 사라져 가는 것을 느끼면서 저체온증이 찾아왔음을 직감했다. 부랴부랴 우박과 눈보라로부터 몸을 피할 수 있는 곳을 찾았다. 그래 봐야 큰 나무 밑이라 바람을 피할 수는 없었다. 급한 것은 잃어버린 감각을 되찾는 것이었다. 눈과 우박을 긁어모아서 시퍼렇게 식어가는  팔뚝과 어깨를 빠르게 문지르는 것이다. 그리고 서둘러 레이어를 껴입는 것이었다. 차갑게 식은 곳은 팔뚝과 어깨만이 아니었다. 가슴과 배 그리고 등짝 역시 차가워지고 있었다.  이 상태로 15분 이상 더 걸었다면 아마도 정신이 혼미해지는 현상까지 경험했을 것이다.  그렇게 한동안 난데없이 찾아온 추위로 고생한 끝에 목적지에 도착하여 일행과 합류했다. 놀라는 눈치가 역력했다. 눈보라 때문에 한동안 작업을 중지하고 텐트에 갇혀 있었다는 것이 그들의 설명이었다. 그 눈보라와 우박을 뚫고 나타났으니 놀라움을 떠나 의아하게 반응했던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면서 어느새 목적한 곳에 도착했다. 이 곳에서 몇 발작 더 이동하면 호수를 내려다볼 수 있다. 그러나 워낙 별 볼일 없는 호수에는 애초부터 관심이 없었다. 유일한 관심은 허기진 속을 달래는 일과 몸을 따뜻하게 해 줄 한 잔의 차였다. 버너에 불을 붙이고 물을 끓였다. 굵게 내리던 눈발은 알맞게 작아졌고 우리는 눈을 맞으며 간단하게 차린 다과를 즐겼다. 산에서 마시는 차 한잔과 달콤한 스낵, 아마도 이 것이 겨울산에서만 느낄 수 있는 정취가 아닐까 싶다. 

     

    아무래도 일행과 같이 산을 오르다 보면 많은 이야기를 하게된다. 주로는 신변잡기로부터 시작해서 일하는 이야기, 사는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한 가지 나름 철칙처럼 지키는 것은 절대로 정치꾼이나 사기꾼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이다. 몸과 마음을 정화시켜보겠다고 오르는 산행길이 자칫 더럽혀지고 불순한 기운으로 오염되기 때문이다.  그 약속은 지금까지 잘 지켜지고 있다. 대통령 선거가 한창이고, 선거 결과로 혼잡하던 지난 몇 달 동안에도 산에서는 정치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하기사 산에서는 경치에 눈이 바쁘고 산 기운에 모든 것이 눌리어 아집과 편견이 자리잡지 못한다. 지금까지 살아온 경험이 다르고 살아가는 환경이 다르니 산에 오르는 목적은 다 다를 것이다. 한 가지 공통점은 삶의 여유를 찾기 위함이다. 사람마다 그 크기가 다 다르겠지만 이렇게 찾아진 여유 속에서 긴장을 누그러뜨리고, 재충전을 하기도 하고, 가능성과 희망을 엿보기도 한다. 행복은 항상 어렵게만 찾아지는 것이 아니다.  작고 좁더라도 다시 찾아오는 여유 속에서 행복이라는 씨앗이 숨을 쉬고 자라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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